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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성부 시인의 산행과 시세계

산무수리 2009. 4. 19. 21:38

 

 

 


800여 차례 등반한 북한산은 빼놓을 수 없는 창작무대


화창한 봄날이다. 한국의 전형적 사내 이성부 시인과 함께 하는 산행이기에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진달래와 개나리꽃도 물이 오를 때로 올라 봄의 절정에 가세했다. 평일 북한산에 종달새 꿩 몇 마리가 상수리나무 잎새를 뒤흔들며 정적을 깼다. 우리나라 산이란 산은 안 가본 곳이 없는 이성부 시인은 바로 전 날도 산악 전문지에 등반기를 쓰기 위해 황학산 아래 직지사에서 추풍령에 이르는 4㎞를 등반하고 돌아온 차였다. 백두대간을 타는 그이에게 북한산은 새발의 피이겠지만 시작활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무대. 그이는 북한산을 한 달에 세 번 이상씩 오르내린다. 20여 년 동안 북한산 등반만 800여 회의 기록을 갖고 있다.

이날 등반 코스는 승가사 쪽 비봉 쪽이었다. 정상으로 향할수록 산수유 꽃이 한창이다. 새소리 물소리에 봄바람도 더욱 싱그럽게 찰랑였다. 정녕 산은 그이의 아름다운 창작무대이다. 그이는 등반 후 반드시 하산주를 들이킨다. 모래내 시장 근처 마포구 중동에 사는 그이는 시장통에서 막걸리도 한잔하고 취해서 세상도 한판 흔들어 본다. 왁자지껄 시장 사람들 속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강골 애주가이다. 어째튼 한 편의 작품은 바로 완결되지는 않고, 생각이 익어야 원고지에 작품을 옮긴다. 보통 원고청탁서가 날라 올 즈음에 무르익어 다듬질이 되곤 한다. 원고 마감이 임박하면 가필 없이 작품을 갈무리한다. 자택 1층에 집필실이 있고, 지하실엔 1만여 권의 책들이 가득 쌓여 있다. 집필실 서재는 누리끼리한 통나무, 초등학교 시절 복도 바닥 같은 황토빛깔에 책 빛깔까지 일체감을 이루고 있었다. 누런 표지의 <창작과 비평>, <문학예술>, <문학과 지성>, <자유문학> 초창기 문예지들이 꽂혀있고, 염상섭의 3대, 박성용, 박이도 시인 등 60년대 문고판 시집들도 정감 어린 표정으로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순간, 그이가 60년대 등단한 시력 40년의 지난한 역사를 걸어온 시인임이 파노라마처럼 스치운다.

시인과 바위와 산이 한 몸이 되는 삶과 문학

아무튼 그이는 이 집필실에서 주로 원고를 쓰는데, 원고 완성되는 시점이 청탁주기가 맞물린다. 이는 많은 원고청탁을 받는 시인임을 의미하면서 여전히 독자들로부터 사랑 받는 국민시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청탁 내용은 시작품에서 산행기, 에세이 등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이의 글이 워낙 시원시원하고 에로틱하다는 점이 편집자들에게 매력을 사고 있다.

보라, 똑 같은 산행을 하면서 움직이지 않은 바위를 두고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던가. "나는 발기한다/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빼고 바라보는/보현봉 푸른 바위가/나를 두근 두근 가슴 뛰게 하듯이/끓는 피로 달려가서/그냥 오르고 오르고만 싶듯이"(봄편지).

그런가 하면 "나는 어느덧 부르르 몸을 떨고/그 바위 숨소리 거칠어질 때까지/까무러칠 때까지/조심스럽게 기다려 맞이하기로 한다"(화강암·9)거나 "빛나는 슬픔덩어리…몸뚱어리 엉켜 또아리진 상처"(바위타기·5) 등, 산이나 바위를 에로티시즘적 욕망의 대상으로 노래한다.

물론 그 작품의 뼈대는 자연과의 합일정신이다. "외로움 속에서 무서움 속에서/비로소 열리는 세계-이 몸 떨리는 合一"처럼. 산은 그이게 슬픔이요 기쁨의 대상이다. 기쁨과 환희의 분신이다. 산은 또 다른 삶의 전형이다. 또 하나의 혈맥이다. 그러기에 그이는 산에게 이녘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을 다 분출하고 나면 무한한 소비의 에너지가 또다시 끓어오른다. 산은 일종의 해방구이다. 산은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재생, 부활, 윤회의 함의어이다.

그렇게 그이에게 있어 산은 영혼이 눈을 뜨고 이데올로기가 숨쉬는 곳이다. "조금씩 조금씩 어우러져서/함께 몸비비고 울고 피흘리다가/마침내 기쁨에 겨워/소리 쏟아내는 한몸
으로 굳어"간다(화강암·2). 이내, 산은 민중으로 때로는 믿음의 대상으로 노래된다. 늘 함께 하는 공동체적 대상으로써 산이다. "그대 몸 출렁이는 그리움에 매달려/내 가쁜 숨 몰아쉬고/그대 오랜 생채기에 내 발 가 디뎌"(바위타기)처럼 그이는 바위 홈을 생채기라고 의미부여 한다. 바위에도 생명이 있다. 서로가 한 몸이다. 그 아픈 몸에 이녘이 기대어 서 있다고 말한다. 자연친화적이다. 퍽 솔직 겸허한 토로이다.

이렇게 고개를 숙이는 벼처럼 시인의 성숙된 삶과 아름다운 정서는 산행시 전반에 걸쳐 그 밑바닥에 샘물처럼 흐르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산과 함께 가자는 이성부 시인. "먼발치서 바라보는 산이 아니라/가까이서 몸 비비러가자./온몸으로 온몸으로/우리 부서지기 위해서 가자"(산). 마침내 숨죽이고 살던 민중의 이름으로 일어서 함께 가잔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부서지는 날까지 함께 말이다.

공사판 막걸리집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신춘문예 당선작

그이가 처음부터 산행시를 썼던 것은 아니다. 그이의 시의 출발점은 전라도·백제·광주이다. 중심으로부터의 소외, 유배와 억압의 공간의 의미이다. 질곡의 역사를 삽질하는 무대였다. 그이는 광주에서 1942년에 태어났다. 광주역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초가집이었다.

당시 광주는 시골 읍내 변두리 정도였다. 그이는 그 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철길 너머로 바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논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저수지가 있고 둑길에는 팽나무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들판으로 메뚜기와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신작로에서 돼지 창자로 만든 공을 차곤 했다. 삼촌과 함께 팽이도 치고 제기도 찼다. 이 들판이 훗날 벼를 쓴 무대가 됐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햇살 따가워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벼) 서로 어우러져 사는 민중들의 끈끈한 연대의식과 그이들의 삶의 모습을 고개 숙여 사는 벼에 빗대어 노래한 작품이다.

그렇게 그이의 시는 남성적이면서 싱싱한 생명력을 동반한다. 그러면서 서정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시누대처럼 찰랑찰랑 휘는 맛, 푸른 엽록소가 철철 넘쳐나며 강한 필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그이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작품의 강렬함에 비해 서정적인 면모에 매료된다. 전형적인 시골 사내의 얼굴, 투박하지 않으면서 굳이 세련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모습, 막걸리처럼 정이 깊고 소주처럼 톡톡 쏘는 사내의 의리. 바로 이 대목이 그이의 문학과 삶이 일치하는 접점이 아닐까 싶다.

그이는 유년시절부터 자연과 밀착돼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 왔다. 도시락을 싸들고 도서관에 다니며 1일 3백 페이지 독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독서광이었다. 사범학교를 가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라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문학을 위해 인문계 고교인 광주고로 진학했다.

이 시절 플라타나스, 눈물 등 명시로 널리 알려진 김현승 선생을 만났다. 스승을 찾는 것이 큰 행사이자 즐거움이었다. 대학노트에 써놓은 시를 갖고 가면 간단한 작품평을 해주고 손수 커피를 끓여 찻잔에 따라 주곤 했다. 그 때 그 손길이 지금도 퍽 인상적이란다. 그이는 고교 3학년 때 전국 규모 학생작품 공모, 백일장 최고상을 휩쓸었다. <전남일보> 신춘문예에도 당선됐다. 이런 글재주로 경희대 국문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입학 후 학보사 기자를 했고 경희문학상도 수상했다. 2학년 때 <현대문학>에 추천을 받아 재등단했다.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지내던 그이는 더 버틸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자 입대를 택했다. 제대 후 광주 집에서 틀어박혀 지낼 때 공사장 근처 오센집이라는 술집에서 막걸리에 마시는 일은 하루 중요한(?) 일과중의 하나였다.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인텔리 노동자들과 친해졌고 훗날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우리들의 양식의 주인공이자 작품의 무대가 됐다. 그렇게 그이는 세 번째 등단을 했다.

가장 민중적인 시인이 5월 광주에 절망한 이유

경희대 은사인 조병화 시인 추천으로 성문각 출판사에 취직해 국어 참고서 집필·편집·교정 일을 봤다. 명동 은성 막걸리집에 가서 김수영, 천상병, 박봉우 시인과 수필가 전혜린 등 선배들을 자주 만났다. 출판사를 전전하던 시절에 평론가이던 친구 염무웅과 <창작과 비평> 편집·교정·투고시 선정작업을 1년 가까이 도왔다. 그 당시 선배격인 고은 시인을 비롯 김지하, 정현종, 최하림 시인과 김현, 김치수 평론가들과 자주 어울렸다.

<문학과 지성>의 모태가 되었던 김현·김화영 주도의 소위 68문학에 관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밥 대신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전라도 연작시를 발표하면서 서민적 정서에 물든 그이만의 독특한 시의 체질을 확립시켜 나갔다. "노인은 삽으로 榮山江을 퍼올린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머지않아 그대 눈물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노인은 다만/성난 사랑을 혼자서 퍼올린다/(중략)/불은 짊어지고 있는데/아직도 논바닥은 붉게 타는데/바보같이 바보같이 노인은 바보같이"(전라도·7)

상당히 역설적인 시이다. 우직한 노인은 양수기도 아닌 삽자루 하나 들고 영산강물을 퍼 올린다. 영산강은 소외된 지역의 상징. 힘없는 사람이 악다물고 오기로 삽질을 하는 모습을 연상해 보라. 눈물이 강물이 될 때까지, 강물의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끝끝내 삽질을 하는그 우직한 저항. 그것은 노여움이요, 분노의 표출이다. 시인은 이를 성난 사랑이라 표현한다. 역설적이다. 결국은 바보같지만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세상사가 아니겠느냐는 것.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버리자는 메시지로 들린다.

그런 그이가 5월 광주 그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10여 년간 시를 쓰지 않았던 일화는 문단의 화제이다. 그이는 유배시집·5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싸우지도 않았고 피흘리지도 않았다./죽음을 그토록 노래했음에도 죽지 않았다./나는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비겁하게도 나는 살아남아서/불을 밝힐 수가 없었다. 화살이 되지도 못했다./고향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때,/고향이 모두 무너지고 있었을 때,/아니 고향이 새로 태어나고 있었을 때,/나는 아무 것도 손쓸 수가 없었다." 죄책감 때문에 5월과 광주라는 단어 대신에 고향이라는 단어로 나즈막히 노래하고 있을 정도이다. 가슴 뭉클한 사내의 솔직한 속내가 보인다.

숱한 굴곡마다 정치·사회적 환경을 합리화 시켜온 일부 정치꾼과 이중적 지식인들과 대조적이다. 그이에게도 굴곡의 시대만큼이나 힘든 여정이 있었다. 잘 나가던 젊은 시인이었
지만 돈이 안되던 시절이었다. 출판사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그이는 어느 날 <한국일보>에 기자모집 사고(社告)를 보고 출판사에서 남모르게 시험공부를 했고, 69년 봄 이 신문사에 입사한 이후 <일간스포츠> 부국장대우 문화부장에 이르기까지 근 30여 년을 근무했다.

5월 광주 때 바로 이 신문사에 있었다. 유신체제를 거부하며 자유실천문인협회(지금의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하며 군부에 불려 다녔던 그이였건만, 아니러니컬하게도 편집대장을 들고 계엄사 검열을 받으러 다녔다. "너무 엄청나서 견디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80년대 초부터 산을 찾았어요. 오랫동안 걷기
산행으로 나를 달랬죠. 암벽에 내 몸을 함부로 굴리기 시작했죠. 몸을 학대할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알았어요."

지리산 등 역사의 능선을 오르내리며 문학적 성과 높여


어쩜 그이는 산행을 통해 신군부에게 빼앗긴 시인의 언어와 기자의 목소리를 애타게 찾아 나서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타는 목마름이었음으로....그렇게 그이는 5월 광주를 넘어 좌우 이데올로기 등 숱한 대립과 상처들로 얼룩진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면서 민족의 역사적 생채기들을 캐냈다. 그 결정체가 시집 지리산이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라는 부제가 붙은 연작시 81편을 묶은 이 시집 속에는 조식·김종식·황현 선생, 서산대사·도선국사, 고정희·정규화 시인, 정순덕·양수아, 이름 없는 소녀전사에 이르는 지리산 빨치산 등 민중의 이야기가 그이의 산행체험과 함께 끈적끈적한 서정의 가락을 퍼 올려 주고 있다.

이 시집은 말 그대로 우리 역사의 편린이요, 시인의 편린이다. 현재 110편까지 연재되고 있는 지리산 연작시는 내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인데, 이 시집이 베스트셀러로서 소리소문 없이 4판 인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 지난해 대산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집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지리산에 관해 앞으로 아무도 더 시를 쓸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산행시집이라고 격찬했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해 5월 산으로 도피한 게 아니라, 민중의 전초병으로까지 불렸던 그이가 운명적으로 싸움의 전선을 산악지대로 끌고 갔는지도. 삶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백성들 편에서 글을 쓰고, 그이들의 희망 찾기와 길 트기 작업으로 일관해온 시인 이성부.

이쯤에서 그이의 속내를 들어보자. "저는 역사의 격변을 참 많이 겪은 세대죠. 어렸을 적 해방과 분단, 전쟁과 가난, 4·19와 5·16, 5·18, 6·29 등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왔어요. 저는 그래요. 시가 비록 역사를 설득력 있게 담을 수 있는 양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적 체험을 담아야 한다고 줄곧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이제 제 체질이 된 거죠"

그렇게 역사의 능선을 오르내렸던 이성부 시인. 등단 40년에 환갑을 넘긴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건강한 체력과 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겸허한 몸짓, 변치 않은 순수빛 얼굴이 사람을 끌어 댕긴다. 외손주를 데리고 시장통을 둘러보고 뒷산을 오르는 시인 할아버지, 15년째 예술인·언론인·회사원·자영업자 등이 총망라된 만고산악회를 이끌고 금수강산을 헤집고 다니는 산사람으로서, 스스럼없이 막걸리 잔을 돌리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인이다.

그렇게 역사가 공존하는 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늘 서민과 함께 호흡해왔다. 어째튼 그렇게 서울의 봄은 왔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민주주의는 싸움도 한판하고 이렇게 이기고 돌아와, 온 산천에 봄꽃들을 찬란하게 불지피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 전문)


■ 이성부 시인은……


1942년 광주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62년 <현대문학>에 열차, 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산 뒤에 두고, 야간열차, 지리산 너를 보내고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뿌리깊은 나무><샘이깊은물> 등에서 문화부장·주간 등을 지냈고, 현재 <민족문학 작가회의> 상임 자문위원·<섬문화연구소> 상임고문이다.

 

 

* 자료:『섬과 등대이야기』 

 

 

 

■ 李盛夫 詩選 

 

 

 

새벽에 부르는 노래


내 이토록 사랑에 비어 있음
그 깊이와 넓이를 잴 수 없나니
이승의 꿈의 잣대를 가지고도
보름 금주(禁酒)의
맑고 예민한 위장을 가지고도
이 사랑 배고픔 결코 잴 수 없나니.
평등의 넉넉한 들판으로나
이 비어 있음 다 채울건가.
새벽마다 잠깨는 사람들의 얼룩진 가슴을 모아
깁고 또 기워
이 벌거숭이에 입힐건가.
이 목마름 적실건가.

 


 

익는 술


착한 몸 하나로 너의
더운 허파에
가 닿을 수가 있었으면

쓸데없는 욕심 걷어차 버리고
더러운 마음도 발기발기 찢어 놓고
너의 넉넉한 잠 속에 뛰어들어
내 죽음 파묻힐 수 있었으면

죽어서 얻는 깨달음
남을 더욱 앞장서게 만드는 깨달음
익어가는 힘
고요한 힘

그냥 살거나 피흘리거나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썩을 수만 있었으면 

  

 

숨은벽 1
.................

내 젊은 방황들 추스려 시를 만들던
때와는 달리
키를 낮추고 옷자락 숨겨
스스로 외로움을 만든다
내 그림자 도려내어 인수봉 기슭에 주고
내 발자국 소리는 따로 모아 먼 데 바위 뿌리로 심으려니
사람이 그리워지면
눈부신 슬픔 이마로 번뜩여서
그대 부르리라
오직 그대 한몸을 손짓하리라 

 

 

화강암 1

.................
이 바위에서는 낯선 정신의 냄새가 난다
견고하면서도 또한 부드러운 외로움의 냄새다
떠도는 넋들이 여기 잠시 머물다 간 때문인가
그들의 남은 옷자락 퍼덕여 바람 일고
바람은 더 큰 바람 불러들여
나를 망설이게 하거나
벼랑 아래로 밀어 뜨리려 한다
나는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거부의 어깨를 껴안는 버릇이 있다
바위여 우리나라의 높은 살갗인 바위여
나는 비로소 그대에게 매달려 나를 부숴뜨리고
그대 몸에 나를 비벼 나를 다시 눈뜨게 하는구나
가벼이 가벼이 귀기울이면
바위여 그대 살결에 도는 더운 핏줄 소리
뜨거워진 우리 한 몸
상처를 지니고서야 내 그대에게 이르는 길 알았으니!

 


삼각산
           

가까이에 있는 산은
항상 아내와 같다
바라보기만 해도 내것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재미있는 산
더 많이 변화를 감추고 있는 산
가까이에서 더 모르는 산
그래서 아내 같다
거기 언제나 그대로 있으므로
마음이 놓인다

어떤 날에는 성깔이 보이고
어떤 날에는 너그러워 눈물이 난다
칼바위 등걸이나 벽이거나
매달린 나를 떠밀다가도
마침내 마침내 포근히 받아들이는 산
서울 거리 어디에서도
바라보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산
내 것이면서 내가 잘 모르는 산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저를 낮추며 가는 산
      
                                
이 산줄기가 저 건너 북쪽 산줄기보다
나지막하게 나란히 내려간다
허리 굽히고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봉우리 하나를 일군 다음
자꾸 저를 낮추며 간다
그러다가 또 못봉을 일으켜 세우더니
무엇에 취한 듯 드러눕는 듯
금세 몸을 낮추어 부드럽게 이어간다
머지않아 이 산줄기 크높은 산을 만들어
더 나를 땀 흘리게 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아 이런 산줄기가 크게 될 사람의
젊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 배운다
저를 낮추며 가는 길이 길면 길수록
솟구치는 힘 더 많이 쌓인다는 것을
먼발치로 보며
새삼 나도 고개 끄덕이며 간다

 

 

너를 보내고


너를 보내고
또 나를 보낸다.
찬바람이 불어
네 거리 모서리로
네 옷자락 사라진 뒤
돌아서서 잠시 쳐다보는 하늘
내가 나를 비쳐보는 겨울 하늘
나도 사라져간다.

이제부터는 나의 내가 아니다.
너를 보내고
어거지로 숨쉬는 세상
나는 내가 아닌 것에
나를 맡기고
어디 먼 나라 울음 속으로
나를 보낸다.
너는 이제 보이지 않고
나도 보이지 않고


 

제석봉
                           

참을성이 많은 봉우리다 있는 듯 없는 듯
넓게 펑퍼짐하게 저를 받들고 있다
아래로는 뼈다구처럼 드러난 영혼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솟아 올라
내 발걸음 자꾸 멈춰서 돌아보게 한다
덕을 쌓고 넓히고 베풀어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무엇 하나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잠잠하여 마르기만 할 뿐이다
힘겨워하는 산 사람들 등을 밀어
위로 위로 올려 보내고
구름과 바람은 장터목으로 내려 보낸다
제 몸을 스쳐가는 것들
저를 때려도
그냥 그대로 앉아 있음이여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산경표 공부

 

 

물 흐르고 산 흐르고 사람 흘러
지금 어쩐지 새로 만나는 설레임 가득하구나
물이 낮은 데로만 흘러서
개울과 내와 강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듯이
산은 높은 데로만 흘러서
더 높은 산줄기들 만나 백두로 들어간다
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산은 위로 치솟는다
흘러가는 것을 그냥 아무곳으로나 흐르는 것
아님을 내 비로소 알겠구나!
사람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들 흘러가는지
산에 올라 산줄기 혹은 물줄기
바라보면 잘 보인다
빈 손바닥에 앉은 슬픔 같은 것들
바람 소리 솔바람 소리 같은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 그저 보인다

 

 

고사목

 

 

내 그리움 야윌 대로 야위어서
뼈로 남은 나무가
밤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밤마다 조금씩 손짓하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한 오십년 또는 오백년
노래로 살이 쪄 잘 살다가
어느날 하루아침
불벼락 맞았는지
저절로 키가 커 무너지고 말았는지
먼 데 산들 데불고 흥청망청
저를 다 써버리고 말았는지
앙상하구나
그래도 사랑은 살아남아
하늘을 찔러
뼈다귀는 뼈다귀대로 사이 좋게 늘어서서
내 간절함 이토록 벌거벗어 빛남이여


 

천왕봉 일출에 물이 들어

 

 

캄캄한 칼바람 속 바위 등걸에 앉아
얼어붙은 털모자 땀고드름을 털어낸다
사람 사는 일 오고가다
더러는 모진 사연 만나는 줄이야 이미 알았거늘
새로 또 닥치는 매서운 추위
아무래도 삶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저만치서 내빼는 것 뒤쫓기만 하다가
넘어져서 덜덜 떨고 있는 일 아니더냐
손발은 카니와 코도 귓볼도 내 것 아닌 것 같아
바람막이 바위 아래로 몸을 낮춘다
한결 고즈넉하다
내 여기 이르러 움츠려 있음은
내 여기 이토록 힘겹게 또는 씩씩하게
험한 길 찾아 올라와서 그대 기다리는 일
길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 사랑 맞이하는 일
온 천하 산지사방 어둠 속에서
문득 동쪽 하늘 어슴푸레 긴 가로 금
마침내 한점 붉디붉은 것 틔어 빛나더니
큰 덩어리로 떠올라
내 온몸 달아오름이여

 

 

벽소령 내음

 

 

이 넓은 고개에서는 저절로 퍼질러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부침개 한 장 사 먹고
남쪽 아래 골짜기 내려다본다
그 사람 내음이 뭉클 올라온다
가슴 뜨거운 젊음을 이끌었던
그 사람의 내음
쫓기며 부대끼며 외로웠던 사람이
이 등성이를 넘나들어 빗점골
죽음과 맞닥뜨려 쓰러져서
그가 입맞추던 그 풀내음이 올라온다
덕평봉 형제봉 세석고원
벽소령 고개까지
온통 그 사람의 내음 철쭉으로 벙글어
견디고 이울다가
내 이토록 숨막힘 사랑 땅에 떨어짐이여
사람은 누구나 다 사라지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떨어지지만
무엇을 그리워하며 쓰러지는 일 아름답구나!
그 사람 가던 길 내음 맡으며
나 또한 가는 길 힘이 붙는다

 

 

중산리

 

 

중산리에서는 산이
바라다보이는 것이 아니라
올려다보인다 조금 멀리 조금 가까이
흰구름 뭉치 천왕봉 언저리에 걸려있다
그리움도 손에 잡혀 가슴이 뛴다
아 비로소 여기 이르렀구나
아잇적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반고비 고개 넘어 세상일 조금은 보일 때까지
꿈에서만 올라보던 그 봉우리
오늘은 내 두발로 온몸으로 오르기 위해
여기 왔거니!
물소리 바람소리가
중산리에서는 옛일들 되감아 내려와서
내 앞에 펼쳐 놓는다
내 앞에 놓여진 오르막길
그냥 무턱대고 가야하는 길 아니다
짐승처럼 킁킁거리며 냄새 맡거나
누군가의 발자국 흔적이라도
그가 쫓기고 스치고 갔을 댓이파리 하나라도
다시 매만지며 올라가야 한다
내 살아 있는 동안의 산길 있음이여
왜 이리 가슴 벅찬 풋풋함이냐


 

좋은 사람 때문에

 

 

초가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까닭은 안다
몸이 젖어서 안으로 불붙는 외로움을 만드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후두두둑 나무기둥 스쳐 빗물 쏟아지거나
고인 물웅덩이에 안개 깔린 하늘 비치거나
풀이파리들 더 꼿꼿하게 자라나거나
달아나기를 잊은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빼꼼이 쳐다보거나
하는 일이 모두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을
감기에 걸릴 뻔한 자유가
그 좋은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다

 

 

 

 

 

 

 

 

출처 : 바로의 산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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