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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산악인 남난희의 삶]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

산무수리 2009. 6. 17. 23:55


전설의 여성 산악인 남난희
"좀 모자란 듯 살아도 전 지금 무척 행복한걸요"


 
  한때 국내 산악계를 호령했던 남난희가 화개골 용강리 시골집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양지바른 툇마루 기둥에 기대서서 상념에 잠겨 있다.
20여년 전 산에 미친 한 처자가 있었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이 처자는 고교를 졸업 후 상경, 직장을 다니다 요샛말로 우연히 '필'이 산에 꽂혔다. 외로움에 지친 그녀에게 마치 산이 종교처럼 다가온 것. 산을 향한 짝사랑이 넘치면서 난생 처음 산악회라는 곳에 들어갔고 25세 때인 지난 1981년 한국등산학교에 입학, 암벽등반을 배우며 산악인으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2년 뒤 이 처자는 그녀의 삶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는 획기적인 계획을 세운다. 금정산에서 진부령을 잇는 '태백산맥 종주등반'이 그것이었다. 기껏해야 지리산 종주가 이뤄지고 있을 무렵 능선을 이어 국토를 종주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선구자적 발상이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것도 처자가, 겨울에, 홀로. 유난히 폭설이 잦았던 1984년 1월 1일부터 76일간의 혹한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종주등반을 성공하자 국내 산악계는 비로소 그에게 '산악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2년 뒤 그 처자는 산악인에게는 당연한 코스인 히말라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에 올랐다.

식을 줄 모르는 산에 대한 열정은 빙벽으로 이어졌다. 1989년 겨울에는 그간 '금녀의 벽'으로 불리던 설악산 토왕성 폭포 빙벽마저 올라 '역시'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백두대간 종주도 해냈다. '산악인의 꿈'인 에베레스트도 넘봤다. 고 지현옥과 곽명옥 등 당대의 최고 여성 산악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장을 맡은 그는 1991년 현지 적응훈련 및 정찰을 겸해 히말라야로 날아가 임자체(6189m)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1993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가 꾸려질 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탓에 원정대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났다. 그가 빠진 원정대는 보란 듯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뤄냈고 그는 심한 상실감에 빠졌다. 당시 나이 37세. 산은 이제 더 이상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돼 가고 있었다. 운명이었다.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소설처럼 청학동 댕기머리 총각이 나타났다. 그와 결혼을 하고 이듬해 아들을 가지며 18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 청학동에 정착했다. 거기서 '백두대간'이라는 찻집을 운영했다. 하지만 이 년 반 만에 아이 아빠는 불가에 귀의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이 계속되자 그녀는 6년간의 청학동 생활을 청산하고 생면부지의 강원도 정선에서 자연학교를 운영하며 민들레 홀씨처럼 뿌리를 내렸다. 행복했단다. 아들 기범이도 잘 자랐고, 틈나면 장돌뱅이처럼 장터 주변도 어슬렁거리고, 정선아라리도 배우고, 막국수와 콧등치기 국수도 먹는 호사도 누렸다. 그것도 잠깐. 호사다마라 했던가. 2002년 태풍 '루사'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아들과 낡은 차만 건지고 모든 것을 잃었다. 수천 권의 책과 자료, 사진 그리고 손때 묻은 등산장비 등 개인적으로 아끼던 물건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정선과의 인연은 삼 년을 못 넘기고 끝이 났다. 이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실의에 빠져 있을 무렵 쌍계사 강원에 있던 아이 아빠가 이 소식을 듣고 지리산 화개에 시골집이 하나 있다고 알려왔다. 남향의 흙집을 본 그녀는 첫눈에 맘에 들어 살기로 결정했다. 지난 2003년 2월말 다시 지리산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남난희(53). 항상 그의 이름 앞엔 '전설의' '국내 1세대 여성 산악인'이라는 수식어가 떠날 줄 몰랐다. 젊었을 땐 정통 알피니스트로, 지리산 청학동에선 차향기를 나눴고 정선에선 자연학교를 꾸렸다. 이젠 하동 화개골에서 된장을 쑤고 찻잎을 따는 평범한 아낙으로 변신했다. 그의 표현대로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는 남난희를 경남 하동 화개골 용강마을 촌집에서 만났다.


남난희의 보금자리 화개골 시골집

 
  산 후배가 남난희의 산서 '하얀 능선에 서면' 출간을 기념해 선물한 판각화 작품이 행랑채 벽면에 걸려 있다.
사실 거처가 하동 화개골이라 내심 우려가 됐다. 지금의 화개골이야 입구의 화개장터를 비롯해 그 유명한 벚꽃길과 쌍계사 그리고 야생차 재배지 및 판매처로 앉은 터만 지리산 자락이지 번잡한 관광지로 변한 지 꽤 됐기 때문이다.

하나, 기우였다. 남난희의 집은 화개골에 아직도 이런 집이 남아 있나 할 정도로 마을에서 구불구불한 포장로로 적당히 올라야 만날 수 있었다.

양지바른 남향의 집 뒤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황장산 촛대봉 산줄기가 섬진강을 향해 내달리고 있고, 시야가 확 트인 정면으론 지리산 줄기가 겹겹이 겹쳐져 있다. 그 끝자락엔 섬진강 너머 거구 백운산이 손에 잡힌다. 좀 더 둘러보자. 본채 뒤 비탈면에는 차나무가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고 바로 옆 사랑채는 대숲에 둘러싸여 있다. 고색창연한 돌담 앞에는 20여 개의 된장독이 숨을 쉬고 있고, 마당 한쪽에는 우물과 커다란 바위동굴이 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정감이 가는 촌집 그대로이다. 여성으론 약간 큰 덩치의 소유자이지만 얼굴에는 언제나 차분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인 남난희를 쏘옥 빼닮았다.

남난희는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것도 인연이라면 참 고마운 인연"이라고 말했다. 유난히 그는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수년 전부터 기자들의 취재는 일절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며 이것도 인연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 하루 시작은 불일암서 백팔배로

매일 아침 그는 집 건너편에 있는 쌍계사 산내암자인 불일암까지 마실을 다녀온다. 왕복 3시간. 백팔배를 하기 위해서다. 이날만은 기자의 요청으로 2시간쯤 늦췄다. 쌍계사의 또 다른 산내암자인 국사암 주차장을 들머리로 산행은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조우한 불일폭포휴게소 산장지기 홍인수 씨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라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그는 일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 이 길을 오르내린다. 이 길이 초행이라는 기자의 말에 남난희는 뭔가를 알려주기에 바쁘다. "4월 말 이 길은 진달래로 황홀경에 빠집니다. 이 길의 종착역이자 지리 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 우측 절벽에는 온통 진홍빛으로 불타오르지요. 보기 드문 절경으로 화엄의 세계가 따로 없어요."

 
  최근 담근 자식 같은 된장을 살펴보고 있는 남난희. 저 멀리 지리산과 백운산이 보인다.
옛 벗과 같은 편안한 이 길을 두고 남난희는 "집 가까이에 지리산의 보석 같은 산길과 그 끝자락에 백팔배를 할 수 있는 불일암과 불일폭포까지 있어 그야말로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고백. "사실 젊었을 땐 산을 볼 줄 몰았어요. 제가 목표로 하는 대상만 보았지 주변의 산은 볼 줄 몰랐어요.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오르고자 하는 그게 산의 전체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것도 산의 일부일 뿐이었어요."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정통 알피니스트가 뒤늦게 산의 품에 안겨 관조하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법을 익힌 듯하다.

"그동안의 산이 '등산(登山)'의 산이었다면 지금은 '입산(入山)'의 산이죠. 원래 우리의 산은 등산의 대상이 아니었잖아요. 서구의 알피니즘이 들어오면서 도전의 대상이 돼버렸죠. 더 빨리,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오림짓의 연속. 인간이 자연에 도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하지만 입산은 달라요.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산과 함께 모든 것을 같이한다고 생각하고 올라보세요. 제 아들 기범이와 산에 오르면 그놈은 나무를 껴안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도 해요. 저에겐 도전의 대상으로 제압해야만 했던 산이 아이에겐 정겨운 친구로 다가와요. 한 세대를 건너서야 산의 소중함을 알게 됐으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요."

 
  남난희는 손님이 찾아오면 툇마루에서 직접 재배해서 덖은 차를 대접한다.
사실 기자는 동행하면서 약간 벅찼다. 질문하랴, 간단하나마 메모하랴, 주변 산세 보랴. 해서, 평소 걸음걸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기자를 배려해 속도를 약간 늦추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엄홍길과 도봉산 산행 때 그 양반은 얘기를 나누다 일순간 쏜살같이 내달리더라고 하자 남난희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산을 타다 보면 산과 합일되는 시점이 일순간 찾아와요.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되죠."

산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어언 45분. 일순간 뜻밖에도 너른 평지가 기다린다. 세석평전 돼지평전처럼 지리산에서 몇 안되는 산중 너른 터인 불일평전이다. 재작년 작고한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방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의 새 산장지기 안주인이 고로쇠 물 한 잔을 건넨다. 남난희와 기자는 한 잔 들이켜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5분이면 불임암에 닿는다. 남난희는 백팔배를 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니 불일폭포를 다녀오라고 한다.

-백팔배를 하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불일암에서 매일 아침 백팔배를 올리는 남난희.
"딱히 꼬집어 바라는 것은 없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줘 고맙다고 빕니다. 언제부터인가 매일 오다 보니 '어제는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이 있었다'는 식의 보고를 하면서 어제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젠 백팔배를 해야 제 마음이 편안해져요."

하산길 산장지기 부부는 마침 산골에 장어가 생겨 국을 끓였다며 한사코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붙잡는다. 찬은 배추와 된장, 산나물에 총각김치지만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하다는 속담이 기자에게도 적용될 줄이야, 밥도둑이 따로 없다.


■ 산만 타는 선머슴이 기막힌 된장을 담그다

다시 남난희의 집 툇마루에 마주앉았다. 차와 함께. 아들 기범이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하다 짬이 나면 그는 양지바른 이곳 툇마루에 앉아 산천을 바라보거나,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신다. 그의 보금자리인 셈이다. 눈길은 당연히 마당의 된장 항아리로 옮겨진다. 얼핏 봐도 스무 개는 넘는다. 그는 재래식 방법으로 된장을 만들어 가계를 꾸려 나간다. 생계유지용이다.

 
  그의 두 번째 저서 '낮은 산이 낫다'.
 
  1990년 펴낸 '하얀 능선에 서면'.
딱히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지만 먹어 본 사람들이 "이렇게 맛있는 된장과 간장은 처음이라고 하니 맛은 있나 봐요"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산만 다니는 선머슴인 줄 알았던 남난희가 언제 이런 재주가 있었느냐고 지인들이 놀리기도 한단다.

"콩은 경험상 강원도산이 맛이 좋아 지인에게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키워달라고 부탁을 하죠. 여기에 지리산의 맑은 공기와 물 햇빛 그리고 5년 이상 묵힌 소금에 자연의 기를 듬뿍 받은 저의 정성이 곁들여지다 보니 맛있다고들 해요. 보람을 느끼죠." 비결은 따로 있었다.

"시골에서 살며 정말 괜찮은 먹을거리를 만들어 나눠주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 저에게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태백산맥 종주등반 종착역인 진부령으로 들어오면서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난희. 사진제공=수문출판사
하나, 남난희는 이 말은 잊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된장을 구입하겠다고 연락이 이따금씩 오지만 보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더 많이 된장을 만들면 더 많은 벌이가 되겠지만 콩 10가마가 넘어가면 손맛을 잃는단다. 무엇보다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노동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그게 그의 지론이다. 대신 그는 지난해부터 차를 재배, 직접 덖은 후 판매도 한다. 아들 기범(남원 실상사 대안학교 3학년)이의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난희는 쌀 이외의 모든 것을 자족한다. 대문 앞 텃밭에서 거의 모든 것을 직접 키운다. 심지어 우물 옆 음지에선 버섯 재배도 직접 한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남난희. "저는 약간 모자란 듯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요. 덜 쓰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는 절제에 이젠 익숙해져 있나봐요."

오랜 기간 화두를 붙잡고 용맹정진하다 깨달음을 얻은 노승이 연상될 정도로 차분하면서 느긋하고 한편으론 사물을 달관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냈던데.

"요즘은 사춘기여서 저에게 약간의 반항도 해 섭섭하지만 저에겐 고마운 스승 같은 존재예요. 제도권 교육은 못 미더워 보냈어요. 본인이나 저도 만족하고 있어요. 저는 아들에게 무엇이 되라고는 요구하지 않아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자연과의 교감을 갖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겠어요."

-산은 이제 완전히 끊은 겁니까.

(잠시 뜸을 들이다)"통일이 되면 백두대간을 밟고 백두산에 꼭 가고 싶어요. 또 역전의 용사들이 좋은 기회를 만들면 따라붙을 겁니다. 괜히 절 은퇴시키려고 하네요. 송충이가 솔잎을 못 먹으면 죽어요."

실제 그의 저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언젠가 통일이 되는 그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북으로) 나설 것이다'.


■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회상하며

- "육체적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어요"

장삼이사들은 남난희 하면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우선 떠올린다. 25년이 지난 지금 남난희는 "내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한 것이 행운이며, 그로 인해 지금의 내가 완성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토록 힘든 등반을 왜 했나요.

"당시엔 산에 미쳤어요. 암벽에 빙벽에, 시간만 나면 산엘 갔어요. 월급을 주는 직장도 산을 타기 위해 다녔어요. 모든 게 산과 타협이 되지 않으면 포기했을 정도였으니까. 답변이 되나요."

잠깐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백두대간이란 용어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친숙한 백두대간이란 개념은 남난희가 태백산맥 종주를 시도할 때인 1984년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고 이우형 씨가 1986년 이 개념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소속 대원들이 종주 후 대간종주기를 연맹회보인 '엑셀시오'에 소개했다. 이는 산꾼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 1990년 월간 '사람과 산'이 연중기획으로 종주기사를 연재함으로써 전국의 산꾼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백두대간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재밌는 점은 당시 인기리에 연재된 백두대간 종주기를 남난희가 썼고, 부산에서 활동하는 권경업 시인이 동행하며 산시를 곁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난희가 76일간 악전고투하며 걸었던 코스는 어디일까. 그는 금정산 고당봉에서 출발, 진부령에서 끝을 맺었다. 도상거리 약 590㎞, 실제 걸은 거리 약 800㎞, 1000m 넘는 봉이 50여 개 그리고 가없는 고개, 령, 봉, 재, 5만도폭 지형도만 27개나 되는 대장정이다. 요즘 산줄기로 보자면 낙동정맥을 타고 오르다 태백산에서 백두대간과 합류해 진부령까지 걸었던 셈이다. 백두대간을 몰랐던 당시로선 이 코스가 국토의 등뼈, 다시 말해 지금으로 치자면 백두대간의 개념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 자체가 당시 인식의 한계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남난희는 "물론 종주는 혼자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10차례 후배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종주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무작정 내달린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 또한 필수였다고 덧붙였다. 떠나기 전 지도상으로 등반하는 인도어 클라이밍으로 전 지점을 머릿속에 넣었고, 지원조와는 1차 만날 지점을 놓치면 2, 3차까지 면밀히 준비했다고 한다.

"배낭이 너무 무거워 1g이라도 줄이려고 칫솔을 반 토막냈고, 길을 잃고 잡목에 갇히고, 가슴까지 쌓인 눈속에 파묻혀 울었어요. 그러면서 차츰 출발 전 자신감은 모두 사라졌어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어요."

당시를 떠올리던 남난희는 "그 정도로 힘들었으면 약간 망설였을텐데 그땐 동계 종주가 얼마나 무모한지도 몰랐다"며 약간 상기된 채 웃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0년 남난희는 이 종주를 바탕으로 책을 엮었다. 제목은 '하얀 능선에 서면'. 국내 산서로는 드물게 중판에 중판을 거듭, 당시로선 베스트셀러로 올랐다. 2004년 남난희는 산을 내려온 산악인의 삶을 실감있게 그린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를 출간했다.
 
 
국제신문/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출처 : 바로의 산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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