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떠나며...
이제 먼 길을 떠남에 앞서
왜 그리도 주위에 못했던 것만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의 두서도 없고 시간도 없고 갈피도 못 잡겠고,
갑자기 쫓기는 마음이 되어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떠나보면 알게 되겠지.
그렇게 서두르지 말았어야 했을 것을.
늦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마음의 점을 찍었어야 했을 것을,
하는 안타까움이 눈에 선한데도 그건 생각일 뿐
나는 한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신열을 앓고 있습니다.
- 김훈동의《붉은 유뮈》중에서 -
아작산을 시작하고 우리도 돈 모아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창립멤버(!) 다섯이 2년 동안 적금을 들어 드디어 탄다.
2년이라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아작산 멤버도 5명에서 어언 15명이니 짧은 세월은 아니지 싶다.
여행지 선정은 6월 산나리가 서유럽을 갔다왔으므로 우린 그곳을 제외한 곳을 가기로 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 보다는 한, 두 나라를 제대로 보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허나, 우리가 가기로 한 터키, 그리스 여행 상품이 성원이 안되 못간단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의 소망인 동유럽 투어로 행선지가 바뀌었다.
계를 들지 않은 멤버도 몇 명 갈 것 같더니면 우여곡절 끝에 4명만 조촐하게 가게 되었다.
12월27일(월)
오늘이 방학식.
배낭을 꾸려 수위실에 맡겨놓고 직원회의을 하고 정리를 하고 바로 공항버스를 타러 갔다. 헌데 애경백화점 앞에서 차를 타니 심심이가 앉아서 안 그래도 내가 이 버스를 탈것 같았다고 막 웃는다.
함께 사이좋게 공항에 도착하니 산나리가 제일 먼저 도착해 있다. 전화통화 한 가이드 박종흥씨과 인사를 하고 티켓, 짐에 부치는 이름표, 여행지 정보 유인물을 나누어 준다.
헌데 이 가이드, 처음 일성이 아주 웃긴다.
해외에 가면 전화거는 방법 이 유인물에 다 나와있단다. 일부러 돈 들여 만든 유인물이니 절대로 쓸데없이 물어보지 말란다. 물어보면 재미 없다는 그 뉴앙스.
그 말 한마디에 우린 아무것도 기대 하지 않고 우리끼리 잘 살아보기로 했다.
난 아직 유로 환전도 안한지라 20만원을 유로로 환전하니 얼마 안되네....
공식적으로 내는 여행비는 물론 개인당 팁 등은 회비로 내 준단다. 그리고 얼마간의 공금을 준비해서 공동으로 들어가는 경비는 공금으로 해결한단다.
결과론이지만, 돈관리 하느라 산나리는 골치가 좀 아팠지만 한 사람이 수고한 덕분에 좀 더 부담없는 여행이 되었다.
우리와 함께 여행할 사람들을 보니 대강 흟어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한껏 멋을 낸 모녀, 짐 보따리도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가족 팀이 몇 명 되는 것 같다.
하긴, 그런 우린 뭐 만만한 팀인가?
다들 한 고집 있고, 소가지도 있고, 심술도 있고, 미모도 있는데.....
수속을 마치고 들어가 남는 시간에 면세점을 들러봐도 살만한 것도 없다. 내가 보기엔 다 너무 비싸니까....
12:40 비행기를 탔다. 자리가 많이 빈단다. 눈치 빠른 홈지기, 엉치도 아프다며 재빨리 뒤로 튄다. 심심이도 덩달아 튄다.
그래 둘이 남은 산나라와 난 널널하게 않아서 사이 좋게 밥을 먹는다.
하나는 비빔밥, 하나는 스테이크. 배도 고프던 차에 맛있네....
저녁까지 기내식을 먹고 오늘 저녁은 없는 거다.
교대로 길게 앉아서 가고 영화도 두편이나 때리고 11시간이 걸려 드디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
가이드가 졸졸 쫓아오란다. 졸졸 쫓아 버스에 승차. 이 차를 타고 숙소로 가서 자면 오늘 일정은 끝이란다.
베를린 근교 브레나 Hotel Bavaria에 도착. 유럽은 화장실 갈 때도 돈을 내야 한다는 말에 심심이는 호텔도 화장실을 따로 떨어져 있는 줄 알았단다.
방은 작고 좀 추운 듯 하다. 라지에타를 최대로 틀고 씻고 빨래를 라지에타에 널으니 잘 마르겠다. 아무튼 첫날은 좀 추운 듯 하게 잤다.
시차 때문에 잠을 계속 자야 한단다. 몇 번 잠이 깨서 잠시 신문도 읽었다. 그 와중에 배가 고프면 잠이 안오는 심심이는 미숫가루까지 타서 먹고 잔다.....
12월 28일(화)
염려한 것과는 달리 아침 식사는 종류가 다양하고 맛도 있다. 서유럽 여행에서 먹거리 고생을 한 산나리는 이 정도면 진짜 너무 훌륭한거 란다. 아무튼 내 입맛에는 다 맛있다.
다들 삶은 계란 한개 씩 비상식으로 챙긴다.
물, 맥주, 커피는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에서 1유로면 구입할 수 있단다. 웬만한 가게보다 싼 가격이니 이왕이면 팔아주란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날이 흐린건지, 해가 덜 뜬건지 구별이 안갈 정도로 컴컴하네....
맨 앞자리를 일찍 탄 덕분에 앉게 되었다. 홈지기는 길게 앉아 가야 한다며 뒷자리로 가고 우리 셋은 앞쪽에 앉아서 간다.
우리 차의 기사는 체코 사람으로 이름은 까를로. 통통하고 마음씨 좋게 생겼다. 짐을 넣고 빼는 일이 힘이 들텐데도 별 내색을 안한다. 헌데 사람들은 도와 줄 생각도 안한다.
차도 체코 버스라는데 끝까지 이 버스를 타고 다니는 거란다.
나, 가이드에게 기사가 친절해서 좋다고 하니 기사는 친절한거 필요없단다. 길만 잘 알면 된단다. 표지판도 제대로 못 읽는 기사도 있단다.
그럼 가이드는 친절해야 좋은거 아닌가요?
그것도 아니란다.
서비스란 동등한 눈높이에서 봉사지 시점이 아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수준으로 하는거란다.
말 되나?
친절하고 일 못하는 것 보다는 자기 할 일을 잘 하는 가이드가 훨씬 나은건가?
아무튼 우리 셋, 그리고 말 많은 모녀팀이 앞쪽에 앉아서 가니 자연 말이 많고 온갖 참견 다 한다. 더구나 해외여행 경험이 아주 많은가보다. 바지런 하기는 내가 울고 갈 지경이다. 뜨개질 까지 들고 와 막간에 뜨개질까지 한다.
더 놀라운건 여기도 역시나 부업주부란다. 아무래도 동업자 같아 못 물어보겠다. 이 딸은 6학년이라는데 체격은 중학교 고학년이고 말 하는건 어른 빰친다.
문제는 다른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게 문제다. 어른같은 아이가 귀여우면 얼마나 귀여울까....
나이에 맞는 순진함이 없는 아이는 좀 부담스럽다. 그나마 난 쌀쌀맞아 보이는지 별로 접근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는 길은 그 유명한 Autobahn. 이곳은 통행세가 없단다.
히틀러가 전쟁을 위해 놓은 길이다. 제한속도는 없지만 차에 바로메타라나 뭐가 있어서 시속, 언제 쉬었나 다 기록이 된단다. 버스는 2시간 반 안에 한번씩 쉬어 주어야 한단다. 그리고 속도도 80km/h 이상 낼 수 없게 되어 있단다.
단속을 하지 않으면서도 단속보다 더 철저하게 할 수 있는 합리적 시스템인 것 같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미국에서 지어주었다는 건물. 지미 카터의 웃는 모습과 닮아 카터 스마일이라는 별명이 있단다.
오늘 가는 곳은 베를린.
가는 길의 풍력발전소 풍차(?)가 간간히 눈에 띈다. 그리고 밀밭이 곳곳에 있다. 이쪽 동네는 거의 평지라 농사짓기 좋단다.
나무도 아주 울창한데 다 조림을 한거란다. 숲에 철책을 해 놓았고 전기 해자까지 간간히 설치되어 있다는데 야생 짐승들이 뛰어 나와 일어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그만큼 조림이 아주 잘 되어있다.
베른린은 Bear에서 나온 말이란다.
베를린 중앙역-일명 동물원역에서 베를린 가이드 양재정씨가 탔다. 진짜 독일 분위기다.
키도 크고 체격도 독일적이고 롱코트에 모자, 장갑까지 끼고 말투도 진짜 무뚝뚝 하다.
왜 동물원 역인가 했더니 근처 1844년 만든 세계적 동물원이 있어서 지은 이름이란다. 우리의 대공원 역쯤 되나보다.
통일된지 15년 된 독일. 동독쪽이 5개, 서독쪽이 11개 주.
통일 후 수도를 정하는데 아슬아슬하게 베른린이 본을 제치고 새로운 수도가 되었단다. 수도가 바뀌는 바람에 한국 대사관은 아직도 월세방을 면하지 못한단다.
날씨가 춥고 행사 준비로 교통이 곳곳에 통제가 되 주로 차 안에서 설명을 해 준다.
전승 기념탑은 먼 발치에서 보고 사진을 찍으란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 후 우리도 경부고속도로와 식목을을 제정했단다.
베른린의 녹지율은 35%가 넘어 공기가 향기롭단다. 또한 호수도 많고 강이 두개나 흐른다고 한다.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르린 천사의 시’가 바로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한다.
특히 이 독일은 송구영신 행사가 거창하기로 유명하단다.
여름에는 7월 셋째 주 토요일은 love party로 테크노 음악 페스티발로 떠들썩 하고 그 이주 전에는 또 동성연애 퍼레이드가 벌어진단다.
참 독일과 안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다.
베르린 장벽은 원래 있던게 아니란다. 1961년 동독 주민들이 하도 망명을 해서 6명에 한명 꼴로 망명을 해서 동독 쪽엣 쌓은 벽인데 이 벽을 쌓는데 2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단다.
총 길이는 165Km였는데 현재 남겨진 곳은 1Km남겨놓아 독일 정부에서 세계 유명 미술가를 초청 해 나름대로의 작품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중 제일 유명한게 Brother kiss로 러시아 화가의 그림으로 호네킨과 브레즈네프의 키스하는 장면이란다.
거리 곳곳에 장벽을 남겨놓아 버스가 계속 동베르린과 서베르린을 넘나드는 거란다.
프러시아는 개국 시에도 개신교였다고 하는데 독일 개신교 총 본부라고 한다. 독일의 성당은 사실은 성당이 아니라 교회라고 한다.
황태자 여름별장을 대학으로 바꾼 ‘홈볼트대학’은 20세기 후반 공산주의의 사신이라고 한다. 특히 철학과가 유명하단다.
헌데 철학, 역사, 법학은 체제가 바뀔 때 마다 수난을 당하는 과란다. 맞는 말이다.
칼 마르크스의 호이헤르바하에 관한 11가지 테제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독교의 본질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게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이 신을 창조했다’란다.
이 홈볼트 대학 바로 왼쪽 베벨광장에서 현대판 분서갱유가 일어났다고 한다. 나치 추종자들이 도서관의 책을 불태웠는데 나중엔 하이네 시에서 예언한 대로 사람까지 태워 죽이는(유태인)일이 일어났다.
성 헤르비히 성당
베벨광장 대각선에 로마 판테온 신전을 본딴 성 헤르비히 성당이 있다.
이 성인은 분서갱유를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 죽임을 당했는데 현재 성인에 봉해져 있다고 한다. 베르린에 유일한 성당이 온갖 잡신을 모셔놓은 판테온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것은 종교가 자유가 있다고 표방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그것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한다.
브브란덴브르크 문 앞에서
베르린의 번화가로 갔다. 가로수는 6줄로 심어진 보리수라고 한다. 헌데 이 보리수를 히틀러가 행진하는데 방해된다고 2줄을 베어 버려 현재는 4줄만 남아있다고 한다.
베르린에 오면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브란덴브르크문에서 설명을 들었다. 문 근처는 행사준비로 분주하고 곳곳을 통제해 놓았다.
카이저 빌헤름 교회
그 다음에 간 곳이 카이저 빌헤름 교회.
2차대전 시 폭격을 당한 그 모습 그대로를 보존해 놓고 바로 그 앞에 벌집모양의 교회를 다시 지어 예배는 이 교회에서 드린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교회나 성당을 보면 우리 비 신자들보다는 감동이 밀려올것 같다.
카이저 빌헤름 교회 안의 추모용 촛불 앞에서
벌집 모양의 새로운 교회.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가 감동적이었다.
벨,두 교회 앞 베르린 번화가
우리는 버스를 타고 드레스텐으로 이동을 한다.
가는 길에 원 모양의 방송탑을 지나가는데 서독방송의 방해전파를 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하는데 공산주의였던 동독에 없는 교회를 비웃기라도 하듯 맑은 날에는 그 구에 +모양이 나타난다. 그래서 별명도 ‘동독의 교회’라고 한다. 나도 지나다 보이 십자모양이 하얗게 비추는걸 보았다.
가는 길에 점심을 한국식당에서 했다. 여행 2일째 인데 벌써 한국식인가 의아한데 아마도 대도시에만 한국식당이 있어서 세 번은 한국식을 제공해야 하므로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주인 아줌마가 상당히 뻑세다고 하는데 다행히 우리 팀과는 큰 마찰없이 여분의 된장찌개, 밥, 반찬을 가져다 주었다.
드레스텐. 엘베강의 피렌체라고도 한다는데 우리가 돈을 내고 하는 옵션관광 중 한 곳이다.
1945년 2월. 80대 연합군 폭격으로 초토화 된 곳을 복원한 곳이라고 한다. 이때 35000명이 사망을 했단다. 이곳에는 13세기에 지은 성십자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 합창단은 비인 합창단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 한다.
현재 50만명의 인구가 사는 귀족도시로(작센왕조) 18세기가 전성기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츠빙거 궁정과 성십자가 교화, 시청사가 유명하단다.
이 도시에 도착해 있을 때는 이미 해가 졌다. 거기다 박쥐는 아니지만 새가 날아 오는데 좀 분위기가 거시기 하다.
건물 외벽에 조각상들이 금방이라도 사람으로 변해 움직일 것 같은 분위기다. 만화영화를 너무 많이 본 후유증인 것 같긴 하지만....
이곳에서 자유시간을 줘 세라믹 조각을 구경하고 파괴된 교회도 보고 상점의 진열된 도자기를 구경하는데 값이 장난이 아니란다.
아무튼 집 떠나면 행복하고 즐거우니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드레스텐 관광을 끝내고 체코국경에 가까운 데신으로 달린다.
작지만 예쁜 호텔에서 체크인을 했다.
우리는 이름이 빨라서 2층에 자리잡았는데 4층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도 없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가느라 고생깨나 한 것 같다.
아무튼 짐을 내려놓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데 친하지 않은 쌀밥과 고기, 그리고 감자. 차라리 빵이 더 나을뻔 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은 시간이라 감지덕지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국경 근처 도시라고 밖에 나가면 안된다고 겁을 준다. 차를 많이 타고 다니고 시차도 적응이 덜되 나갈 엄두도 내지 않았지만....
밤에 깨서 보니 눈인지 비인지 뭔가가 내리는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보인다.
12월 29일(수)
아침에 비가 조금씩 내린다.
아침은 어제 저녁에 비해 생각보다 맛이 있다.
차에 짐을 싫는데 우리 일행 잘난 남자들은 기사를 도와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막 제대했다는 혼자 온 대학생은 뭐 그리 중요한 짐이 들었는데 배낭을 계속 들고 다니고 사진을 찍어 대는데 사진 찍으러 온건지, 여행을 온건지 좀 보기 그렇다. 그 나이면 패키지가 아니라 배낭을 다니는게 훨씬 좋지 않을까 싶다.
8:55 데신 출발. 순전히 잠만 자고 가네. 너무 아쉬워 식당에서 사진 한 장 찍었다.
넓지 않는 볼타바 강을 끼고 간다. 말로만 듣던 프라하. 난 그 프라하가 헝가리인줄 알았는데 계속 체코 이야기를 한다.
왜 그럴까? 프라하는 체코의 도시란다. 이렇게 무식할 수가....
볼타바 강은 스메타나 교향곡 ‘나의 조국’ 중 몰다우강과 같은 강이었다.
체코의 조상은 마자르족이란다. 한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기도 했는데 그 후 오스만 터키의 공격을 받고 2차 세계대전 후 뱌르샤바 조약 이후 소련 위성국가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시위가 있었는데 이때 그 시위는 실패했다고 한다.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분리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침입을 받는 등 역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왔고 경제력 격차가 너무 벌어져 서로 갈라졌다고 한다.
또한 체코는 평지가 많고 슬로바키아는 산악지대가 많다고 한다.
체코의 국가 신용도는 한국 보다 높다고 한다. 그리고 세금이 소득의 40%로 높은 대신 교육비는 국비란다. 사교육 비가 많이 드는 우리에 비해 참 다른 상황이다 싶다.
10:25 프라하 도착. 헌데 가이드를 11:00에 만나기로 했단다.
공터에 차를 주차해 놓고 자유시간을 주는데 의외로 날씨가 쌀쌀하다.
바로 길 건너의 맥도널드가 있다. 다들 화장실도 갈겸 그쪽으로 몰려간다. 우리도 그곳에 가서 아이스크림, 쉐이크 등을 먹었다. 바로 뒤에는 축구장이라는데 이쪽 축구도 알아준다고 한다.
가이드 김선범씨를 만나서 프라하 투어를 시작한다. 오늘은 차에서 내리면 저녁에나 차를 탈 수 있다고 한다.
투어를 하기 전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둥그런 원탁에 음식이 나오면 조금씩 덜어먹는데 우리 팀 만큼 잘 먹는 팀도 없는 것 같다. 남이 해 주는 밥은 웬만하면 다 맛이 있더구만 넘들은 햇반, 사발면, 김, 고추장, 어느 팀은 풋고추 까지 싸 가지고 와서 먹는다.
헌데 한국음식을 밝히는 부류들이 의외로 장년층보다는 청소년 층이 더 그런 것 같다.
국내에서는 피자, 햄버거, 고기 종류가 없으면 밥을 안 먹는 청춘들이 왜 남의 나라만 나오면 한국음식을 찾는지 진짜 모르겠어라.....
체코의 국기는 왼쪽 위쪽의 흰색은 모라비아 지역을 나타내고 아래쪽 빨강은 보헤미아 지방, 그리고 오른쪽 파란색은 슐레지안 세 지역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바로 길 아래 로레타 성당을 설명하는데 아마 갈 시간은 없고 사진 찍을 시간만 있나보다. 먼 발치에서 사진만 찍고 졸졸 따라서 이동을 한다.
조망권을 내지 않기 위해 창문을 없애버리고 그림으로 대체한 건물
다음에 보여주는 건물은 어느 귀족이 사는 건물로 창문 중 두개는 실제 창이 아니고 그림으로 창 모양을 그려놓았다. 그 당시 세금을 걷다 전망세까지 만들어 그걸 내기 싫어 창문 두개를 막아버린 흔적이란다.
이쪽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적으로 지정된 곳이라고 한다. 아무튼 한갓지면서도 그림같은 모양의 집이 여기저기 있다.
가는 길에 재미난 복장을 한 핫 와인 집을 지나니 어느 집 앞에 선다.
그 집 앞에는 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옷감을 팔 때 한자씩 잴때 팔로 재는데 각자 팔 길이가 달라 시비를 거는걸 막기 위한 요즘의 표준 자이다. 헌데 지금의 한자와 거의 일치 한다고 한다.
문 오른쪽 쇠로 된 자. 지금의 한자랑 거의 길이기 같다고 한다.
그곳에서 부지런히 걸어 가니 프라하 궁이란다. 이곳은 대통령 관저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정문의 위병 교대식을 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우리들도 그 위병과 사진을 찍었다.
헌데 이 궁 아래쪽에서 내려다보니 프라하 시내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보이는데 그야말로 그림같다. 그야말로 감탄이 절로 나온다.
프라하 구 시가지를 내려다 보며
환상적인 구 시가지
성 비투스 성당.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주 환상적이었다
다시 프라하 궁전을 들어가니 뒤쪽에 성비투스 대성당이 있는데 스테인드 글라스가 일품이다. 그 안에 보물을 볼 수 있는데 표를 구매해야 하나보다. 우린 시간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곳을 지나면 황금소로가 나온다.
따로 티켓을 내고 들어가는데 황금 세공사와 성의 일꾼들이 살던 곳으로 아주 작은 집과 굴뚝들이 정겹다.
이곳 22번지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많은 단편을 저작 했다고 한다. 2,3 층은 무기박물관이고 1층은 여러 가지 기념품 가게가 있다.
이곳을 빠져나오니 뒤쪽에 Toy Museum이 있다. 이곳도 역시 따로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이 문을 나서서 우린 소지구 광장을 향해서 거의 뛰듯이 걸어가며 잠깐 서서 설명을 듣는다. 헌데 이 계단길의 운치가 아주 좋은데 사진 찍을 틈도 주지 않는다.
가게의 전시된 상품도 너무 아름다운데 사기는 켜녕 구경할 시간도 없다.
난장이가 살았음직한 자그마한 황금소로의 굴뚝들
인상적인 포스터
내려가는 길에 모차르트와 인연이 많은 성니콜라스 성당을 지난다.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곡이 초연되기도 하고 모차르트의 죽음을 체코시민들이 누구 못지않게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계속 내려가니 카를교가 나온다.
헌데 이곳은 집시들의 소매치기가 유명한곳이라고 소지품을 특히 조심하란다. 뭐 별로 중요한 물건도 없으면서도 혹시나 싶어 배낭을 앞으로 매고 걸으려니 좀 기분이 그렇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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