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에 관하여 - 조창환(1945~)
나무에만 결이 있는 게 아니라
돌에도 결이 있는 걸 알고 난 후
오래된 비석을 보면 손으로
쓰다듬는 버릇이 생겼다
돌의 결에 맞추어 잘 쪼아낸
글씨를 보면
돌을 파서 글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글자를 끌어안고 돌의 결이
몸부림 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기억들,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 같은 (…)
목숨이 제 결을 따라
고꾸라진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파리의 로댕박물관에는 조각가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커다란 육면체 암석의 윗부분에 여인의 두상을 조각하다가 중단한 작품을 보고 탄성을 금할 수 없었다. 물속에서 얼굴이 솟아 올라오듯, 돌 속에서 머리와 이마와 윗눈썹이 떠오르다가 멎은 모습이었다. 이 미완성 작품은 눈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오래된 비석을 보면 손으로 쓰다듬는’ 조창환 시인의 버릇도 비슷한 체험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렇게 만지고 싶은 작품에는 꼭 ‘만지지 마시오’라는 경고가 붙어 있다.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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