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한 크리스마스 되시와요~ '동지'- 신덕룡(1956~ ) 폭설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졌다. 눈을 감아도 환한 저 길 끝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 뒤척일 때마다 풀풀, 시름이 날릴 테지만 어둑해질 무렵이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게다. 숭얼숭얼 죽 끓는 소리 긴 겨울밤들을 건너..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12.22
빕스에서 밥먹기 '새벽 하늘'- 정희성(1945~ ) 감나무 가지가 찢어질 듯 달이 걸려 있더니 달은 가고 빈 하늘만 남아 감나무 모양으로 금이 가 있다 고구려 적 무덤 속에서 三足烏 한 마리 푸드덕 하늘 가르며 날아오를 거 같은 새벽 어스름 즈믄 해여 즈믄 해여 잎 다 떨군 겨울나무 사이 달 뜨면 그것, 한 풍경입니다. 달 ..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11.18
육군 엄마 노릇하기 '불면'- 강정(1971~ ) 오래 전에 본 적 있는 그가 마침내 나를 점령한다 창가에서 마른 종잇장들이 찢어져 새하얀 분(粉)으로 흩어진다 몸이 기억하는 당신의 살냄새는 이름 없이 시선을 끌어당기는 여린 꽃잎을 닮았다 낮에 본 자전거 바퀴살이 허공에서 별들을 탄주하고 잠든 고양이의 꼬리에선 부지불..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11.16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1922~2004)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10.27
함께 달리자~ `국경`- 송재학(1955~ ) 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햇빛이다 풀을 뜯어 먹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는 햇빛이다 매일 갈기를 바꾸어주는 햇빛이다 능청스런 건 말이나 햇빛이나 닮았다 헹구어내지 못하는 내 빈혈만 애써 갈기 사이에서 햇살을 가려낸다 호수에 거꾸로 박힌 설산이 지금 호수를 달래는 중인 것..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10.02
플라스틱 머니 '야채사(野菜史)'- 김경미(1959∼ )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05.20
나는걷는다-베르나르 올리비에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느림, 비움, 침묵의 1099일 도착하기만을 원한다면 달려가면 된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걸어서 가야 한다. -장자크 루소'에밀' 중에서- 책 소개 많은 기자들이 그 옛날 마르코 폴로의 여정을 따라 실크로드 대장정의 길을 나선다. 하지만 '문장'이 된다 하여 모두 '미지'..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03.17
숯가마 체험기 '물을 뜨는 손'- 정끝별(1964∼ ) 물만 보면 담가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 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02.04
무늬만 자전거도로 ‘학생부군과의 밥상’ - 박남준(1957∼ ) 녹두빈대떡 참 좋아하셨지 메밀묵도 만두국도 일년에 한 두어 번 명절상에 오르면 손길 잦았던 어느 것 하나 차리지 못했네 배추된장국과 김치와 동치미 흰 쌀밥에 녹차 한 잔 내 올해는 무슨 생각이 들어 당신 돌아가신 정월 초사흘 아침밥상 겸상을 보는가 아..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01.31
배 아팠던 날 '뒤편' - 천양희(1942~ )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뒤편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한 사람이다. 넉넉한 사람은 고.. 산 이외.../2006년 일기장 2006.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