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언저리 산행 (2/1) 물통 - 김종삼(1921~84)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겨울이면 습관처럼 꺼내드는 시집 한 권.. 산행기/2014 산행 2014.02.03
황샘 사진으로 본 킬리만자로 5 심장이 아프다 - 김남조(1927~ )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중략)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 먼나라 이야기 2014.01.25
황샘 사진으로 보는 킬리만자로 4 붓끝으로 그린 풍경 - 데이비드 매캔(1946~ ) 옛날 옛적엔 전혀 아무 일도 아니었지, 어디든 원하는 데 오줌 누던 사내들 뒷골목 저편 벽에다 아니면 길가에. 달빛 어린 듯, 거침없는 듯 끊일 듯, 이어질 듯 시골이나 도시 풍경에 덧칠하는 붓놀림, 하던 일 마칠 때까지 점잖게 속이지. 와우! .. 먼나라 이야기 2014.01.25
황샘 사진으로 보는 킬리만자로 3 서책 - 김수영(1921~68)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 이 책에는 신(神)밖에는 아무도 손을 대어서는 아니 된다 잠자는 책이여 누구를 향하여 앉아서도 아니 된다 누구를 향하여 열려서도 아니 된다 지구에 묻은 풀잎같이 나에게 묻은 서책의 숙련― 순결과 오점이 모두 그의 상징이 되려 .. 먼나라 이야기 2014.01.25
황샘 사진으로 보는 킬리만자로 2 콘트라바스 - 김영태(1936~2007) 허풍쟁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나 숨 쉬는 악기樂器, 너그러운 인간 같은 이 악기가 나는 좋다 비 오는 날은 내 몸이 퉁퉁 부었다 콘트라바스도 부었다 너를 껴안고 싶다 둘이 웃었다 가브리엘 포레 곡은 그 뚱뚱한 몸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 먼나라 이야기 2014.01.25
황샘 사진으로 보는 킬리만자로 1 또다시 새해는 오는가 - 이호우(1912~70) 빼앗겨 쫓기던 그날은 하 그리 간절턴 이 땅 꿈에서도 입술이 뜨겁던 조국의 이름이었다 얼마나 푸른 목숨들이 지기조차 했던가. 강산이 돌아와 이십 년 상잔相殘의 피만 비리고 그 원수는 차라리 풀어도 너와 난 멀어만 가는 아아 이 배리背理의 단.. 먼나라 이야기 2014.01.25
징하게 길었던 영춘기맥 (전재-황곡,1/19)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 송찬호(1959~ )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있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 산행기/2014 산행 2014.01.21
하산 후 이야기 (1/9~12) 일찍이 나는 -최승자(1952~ )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 먼나라 이야기 2014.01.18
킬리만자로 6 (하이캠프-음웨카캠프-음웨카 게이트-아루샤, 1/8) 경계 - 이향(1964~ ) 겨울 배추밭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서로에게 달라붙어들 있다 살점들의 기억이다 언뜻 보면 한몸 같아도 죽음을 걷어내면 삶까지 딸려나올 것 같아 멀찍이 보고만 선 겨울 배추밭 지나치고 나서야 돌아보는 사이처럼 배추와 배추 사이 그 걸음 함부로 뽑아버릴 수가 없.. 먼나라 이야기 2014.01.18
킬리만자로 5 (바라푸-우후루봉-바라푸-하이캠프, 1/7) 농담 - 이문재(1959~ )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먼나라 이야기 2014.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