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인줄 알았는데 제천이네? (행치령-하뱃재, 12/15) 레코더 - 황인찬(1988~ ) 교탁 위에 리코더가 놓여 있다 불면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 그 아이의 리코더를 불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그랬다 보고 있었다 섬망도 망상도 없는 교실에서였다 리코더는 입으로 부는 것인데 그걸 불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도 없었는데 왜? 시인이 소심하..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2.16
간만에 청계산 가기 (12/8)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1958~ )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2.08
당나귀, 장곡현에서 전원 탈출? (춘천기맥 졸업, 12/1) 아주 작은 형용사야 - 안현미(1972~ ) 나무 난로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여자의 갈비뼈 하나 꺼내들고 한 사내가 시간을 쪼개고 있다 난로 위엔 시간으로 끓인 주전자가 저 혼자 은밀하게 끓어오르며 노란 잠수정처럼 떠오르고 있다 시간을 쪼개다 지루해진 사내는 여자의 갈비뼈를 시간의 ..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2.01
받을 복이 많았던 날 (11/24) 경이로운 나날 - 김종길(1926~ ) 경이로울 것이라곤 없는 시대에 나는 요즈음 아침마다 경이와 마주치고 있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창밖 화단의 장미포기엔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이 영글고, 산책길 길가 소나무엔 새 순이 손에 잡힐 듯 쑥쑥 자라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항다반으로 보.. 산 이외.../2013 일기장 2013.11.27
마음도 몸도 겨울이어라 (영춘기맥: 행치령-하뱃재, 11/17) 체온 - 장승리(1974~ ) 당신의 손을 잡는 순간 시간은 체온 같았다 오른손과 왼손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놓았다 가장 잘한 일과 가장 후회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남의 카드를 보려면 제 카드도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방을 실망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1.18
영춘기맥 (홍천고개~가락재, 11/3) 애인을 배낭 속에 넣고- 박덕규(1958~ ) 애인을 배낭 속에 넣고 아침이면 학교로 간다 멀리 강물을 내다보면 덜컹대는 전철 속에서도 행복하다 강의실 창가에 앉아 내가 졸고 있는 동안 애인은 배낭 속을 빠져나와 의자와 의자 사이를 교단 위를 교수님의 콧잔등 위를 뛰어다닌다 아무도 그..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1.13
의상대산 원효봉에서 만난 단풍 (북한산, 11/2)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김광규 번역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1.12
역시나 숨은벽 (북한산, 10/27) 단풍 숲에서의 짧은 키스 - 박상순(1961~ )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너는 비행기를 타고 산맥을 넘었다 여러 해 동안 너는 밤의 열기 가볍고도 유쾌한 사랑 그러나 나는 아직 체리향이 든 해열제를 먹고 누워 있는 키 작은 아이 단풍 숲에서의 짧은 만남이 오기도 전에 내 안에서 솟아오른 불..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0.27
영춘기맥에도 가을은 오고 (행치령-김부리, 10/20) 달빛 사용 설명서 -홍일표(1958~ ) 희귀종이 되어 멸종 위기에 처한 달빛은 머잖아 박물관 한 구석에 처박히거나 고서의 한 모퉁이에서 잔명을 이어갈 것이다 함부로 달빛 한 점 건드리지 마라 주의사항을 숙지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휘발할 것이다 여간해선 달빛 한 올 발굴할 수 없지만 용..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0.22
친구 덕분에 가을 소백산을 만끽하다 (10/9) 시인의 말 - 신영배(1972~ ) 사라지는 시를 쓰고 싶다 눈길을 걷다가 돌아보면 사라진 발자국 같은 봄비에 발끝을 내려다보면 떠내려간 꽃잎 같은 전복되는 차 속에서 붕 떠오른 시인의 말 같은 그런 시 사라지는 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 쓰다가 시만 남고 내가 사라지는 시 내가 사라지.. 산행기/2013산행일기 201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