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원정기 9 (샤모니에서 쩨르마트로) ‘물거울’- 이경교(1958~ ) 이곳에 물은 얼마나 많은 알을 깐 걸까 질펀한 저 밑바닥까지 따뜻하다 어지러운 파문을 만들어 깊은 숨을 내쉬는 물의 어느 빛나던 과거 물굽이 눈부신 한나절, 물이끼 속으로 스며들면 무거운 잠의 수면 아래, 몸이 불어버린 물이 알을 슨다 이따금 꽃잎총을 쏘는 별빛과 눈.. 먼나라 이야기 2008.08.24
알프스 원정기 8 (몽블랑 정상에 서다) ‘나의 신(神)’ - 차주일(1961~ ) 직립의 하루를 마치고 와불처럼 눕는다 얼굴과 모습을 지우고 살아남은 자가 내 몸을 맞이한다 그가 내 몸과 관절과 주파수와 조도를 다 맞추고 나면 내 용기를 부추기는 소리가 심장과 인화되고 온몸에 박혀있던 내 가식들이 사라진다 누구인가? 밤새 태초의 나로 돌려.. 먼나라 이야기 2008.08.24
알프스 원정기 7 (다시 구떼로) ‘운동장에서’ - 한성례(1955~ ) 푸듯푸듯 흙먼지가 날아왔다. 살끝에서부터 간지럼타는 유년의 기억들 미루나무 꼭대기에 고추잠자리가 맴돌면 어지럼증처럼 들판 끝을 바라보았던 들녘으로 난 나의 운동장, 끝은 아득했다. 벼가 누럿누럿거리면 한귀퉁이 두레박 우물물이 가득 고이고 운동회는 시작.. 먼나라 이야기 2008.08.23
알프스 원정기 6 (휴식) ‘아톰’ -권혁웅(1967~ ) 내 삶은 낙원이발관에서 시작되었죠 2대 8 가르마가 지나가는 땅딸이 이발사 아저씨, 나는 아저씨의 삐죽 솟은 머리와 2대 8로나뉜 포마드 냄새가 좋았죠 한겨울 넓은 마당엔 하얀 눈과 하얀 김 오르는 주전자와 하얀 수건과 하얀 가운을 입은 땅딸이 아저씨가 있었죠 의자 팔걸.. 먼나라 이야기 2008.08.23
알프스 원정기 5 (등정을 포기하고..) ‘암호’ - 이승훈(1942~ )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역은 총에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커다란 하나의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 먼나라 이야기 2008.08.21
알프스 원정기 4 (샤모니~구떼)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 박상순(1961~ )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먼나라 이야기 2008.08.20
알프스 원정기 3 (고소훈련-에귀디미디) ‘독락당(獨樂堂)’- 조정권(1949 ~ )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윤선도가 유배지에서 작은 집을 짓고 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맞아들이지 않아도 청산이 문 안.. 먼나라 이야기 2008.08.20
알프스 원정기 2 (장비점, 안시 관광) ‘서리 뒤에 가을꽃’ 전문- 곽효환(1967~ ) 지난 여름, 큰비에 모든 것이 쓸려 간 강원도 태백산 줄기 산골 마을, 개울물길이 바뀌고 옹색한 살림살이 추스른 녹슨 컨테이너 주변에 어느새 찬 서리가 내리고 듬성듬성 가을꽃 피었습니다 줄기 따라 갈라진 가지 끝에 간신히 매달린 앙상한 꽃망울 누군가.. 먼나라 이야기 2008.08.19
알프스 원정기 1 (인천~샤모니) ‘친전’- 박성우(1971~ )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인공호흡기를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 병에 걸린 오골계의 맥풀린 똥구녕 같은 보름달이 떴어요 회백색 분비물이 제 얼굴로 쏟아지고 있어요 아버지 그거 아세요 오늘이 성탄 전야라는 거 탄일종이 울리고 있어요 끝으로, 제 남은 생의 모든 성탄절을 동봉.. 먼나라 이야기 2008.08.15
은이 언니의 북해도 여행 사진 ‘옛날 사과’ - 김록(1968~ ) 홍옥은 무르익은 계절과 다른 계절 사이에서 그냥 시감이고 촉감이고 미감일 뿐 그 겉과 속이 붉고 희든 단단하고 부드럽든 시고 달든 마음대로 왔다 간다 우두커니 김록 시집을 읽다가 밖을 보니 가을 햇살이 8층 앞에 와서 소요한다. 선한 눈으로 나를 보고 인사도 않고.. 먼나라 이야기 2008.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