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 35

남프랑스 2 (레보드 프로방스-아를, 3/23)

이병률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 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먼나라 이야기 2024.05.01

남프랑스 1 (파리-아비뇽, 3/22)

박규리  나에게도 소원이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낮게 드리운 초라한 집 뜰에 평생을 엎드려 담장이 될지언정 스스로 빛나 그대 품에 들지 않고 오직 무너져 흙으로 돌아갈 한 꿈밖엔 없는 돌이 되는 겁니다 구르고 구르다 그대 발 밑을 뒹굴다 떠돌다 떠밀리다 그대 그림자에 묻힌들 제아무리 단단해도 금강석이 되지 않고 제아무리 슬퍼도, 그렇지요 울지 않는 돌이 되는 겁니다 이내 몸, 이 폭폭한 마음 소리없이 스러지는 어느날, 그렇게 부서져 고요히 가라앉으면 다시 소쩍새, 다시 소쩍새 우는 봄날에 양지바른 숲길에 부풀어오른 왜 따스한 흙 한줌 되지 않겠습니까 지쳐 잠든 그대 품어안을 눈물겨운 무덤 흙 한줌, 왜 되지 않겠습니까  아침 일찍 우리도 출발 준비를 했고 주인이 와서 열쇠 받고 짐을 들어 준다는데 큰 ..

먼나라 이야기 2024.05.01

프랑스 한달살기 14 (몽파르나스 타워, 3/21)

임두고 늦은 사월 사방이 수초처럼 젖어 있어 까닭 모를 내 그리움 그 속 깊은 곳까지 젖고 있다. 문득 젖은 알몸으로 다가서는 뜰 앞의 박태기 박태기나무 꽃들은 그저껜가 그그저껜가 계단 위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던 그녀의 치마폭처럼 자줏빛 지울 수 없는 자줏빛이다. 박태기 박태기나무 꽃이여 하필이면 네 꽃이름이 박태기인가 아무렇게나 불리워진 네 꽃이름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어린 시절 마른 수수깡 팔랑개비처럼 가벼워진다. 그리움은 젖을수록 가벼운 날개를 다는가 내 가슴은 지금 그 모순을 접어 만든 팔랑개비 누가 작은 바람끼만 건네도 천만 번 회오리치며 돌아버릴 것 같은 미쳐버릴 것 같은 가벼움 속으로...... 나는 지금 그렇게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있다. 박태기 박태기나무 꽃이여 네 꽃이 ..

먼나라 이야기 2024.05.01

프랑스 한달살기 13 (몽생미셸, 3/20)

이진명 베란다 창이 가른 검은 그늘의 안쪽에서 바깥의 찬연한 햇빛 속, 잔꽃송이들을 새빨갛게 뭉쳐 매단 명자나무를 익히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명자야, 하고 불러버렸다. 외로움과 시름이 탕, 깨어나더니 명자야. 뭐하니. 놀자. 명자야. 우리 달리기 하자, 돌던지기 하자.숨기놀이 하자. 명자야. 나 찾아봐라. 나 찾아봐라. 숨어라. 나와라. 나와라. 베란다 창이 가른 검은 그늘의 안쪽에서 바깥의 찬연한 햇빛 속, 잔꽃송이들을 새빨갛게 뭉쳐 매단 명자나무를 익히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명자씨, 하고 불러버렸다. 외로움과 시름이 땅, 달려나가더니 명자씨. 우리 결혼해. 결혼해주는 거지. 명자씨. 우리 이번 여름휴가 땐 망상 갈까.망상 가자. 모래가 아주 좋대. 명자씨. 망상 가서, 망상 바다에 떠서, 멀리 멀리로. ..

먼나라 이야기 2024.05.01

프랑스 한달살기 12 (라파에트~에펠탑, 3/19)

김종제 캄캄한 어둠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어 꽃도 나무도 눈을 번쩍 떴으니 새벽, 당신이 스승이다 얼어붙은 땅속에 숨쉬고 맥박 뛰는 소리를 던져주어 온갖 무덤의 귀가 활짝 열렸으니 봄, 당신이 스승이다 정수리를 죽비로 내려치며 한순간 깨달음을 주는 것은 말없이 다가오므로 스쳐가는 바람처럼 놓치지 않으려면 온몸으로 부딪혀 배워야 하는 법 흘러가는 강물과 타오르는 횃불과 허공에 떠 움직이지 않고 바닥을 응시하는 새와 제 태어난 곳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죽어가는 물고기도 감사하고 고마운 스승이다 죄 많은 우리들 대신에 십자가에 사지를 못박히는 일과 생을 가엾게 여기고 보리수나무 아래 가부좌하는 일이란 세상 똑바로 쳐다보라고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 라파에트 오픈런  이번 여행 미션 중 샤넬백 구입을 ..

먼나라 이야기 2024.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