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2021산행 92

한양도성길(혜화문~창의문, 11/27)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말려 쓰..

일자산 가기 (11/24)

장순금 어느 발레리나의 발이 화면에 클로즈업 됐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 굴려 뼈가 휘어진 발의 가락들 공중으로 솟구치는 힘 꽃무더기 우주 속으로 폭발하며 아라베스크, 날아오르는 동안 발톱은 달아나고 발가락은 구부러져 땅을 파고들고 흙속에서 갓 캐내온 울퉁불퉁 터진 저 기형의 힘이 한 마리 백조의 꽃다발을 공중에 띄웠다 하늘과 내통하는 길은 시간과 피를 나누는 일이다. 코스개관: 중앙보훈병원역 3번 출구-천문허브공원-일자산-하남사거리-성내천-올림픽공원북문 (점심)-올림픽공원 몽촌토성길 걷기-올림픽공원역 out (아침엔 쌀쌀했는데 낮이 되며 풀림. 미모 산악회 셋) 차영샘이 월욜 코로나 추가 접종을 받아 쉬운 산으로 가자고 했다. 일자산은 너무 멀어? 아니? 9호선 있어 괜찮아..... 중앙보훈역에서 만나기로..

다시 비슬기맥으로 (함박지-화악산-앞고개, 11/21)

강서일 아내가 쌀을 안친다 천년 전 어머니가 안치신 쌀 오늘 저녁 하얀 밥이 된다 아이들은 아직 밥에 관심이 없고 아내는 새벽부터 쌀을 찾는다 요즘은 밥이 기우뚱대더니 아이들처럼 컴퓨터게임이 가깝고 가상현실이나 사이버여행, 밥을 벌지 않아 좋고 무엇보다 혼자라 자유롭다 그래도 밥이다, 밥. 밥을 피하지 말자 정면으로 직방으로 당당히 밥과 싸우자 피아노가 그림이 컴퓨터가 문학이 프로야구가 수능점수가 결국 밥이다 밥으로 집을 짓고 자동차를 사고 밥 타고 음악회 간다 아, 유통구조가 너무 복잡한 오늘밤 뜨거운 밥. 코스개관: 함박지 송전탑-화악산-운주사-용샘-봉천재-형제봉-505봉-팔방재-258봉-앞고개 (10:35~17:30. 덥게 느껴진 날. 오후엔 흐림. 5명) 당나귀가 6개월이면 끝냈을 비슬기맥을 2년..

한양 도성길 걷기 (남대문-혜화문, 11/19)

박정순 새들도 둥지를 비우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오후 텅 빈 집에서 볼륨을 높이고 듣는 "칼 오르프"*의 [운명의 신-카르미나 부라나] 블랙 커피의 떫은맛처럼 빳빳한 자존심이 뜨거운 물에 녹아버리는 크림 같다 사각사각 떨어지는 낙엽도 운명의 신에 복종하듯 넓은 바다의 길 버리고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의 회귀 푸른 밧줄로 돋아나는 욕망이 커피 잔 속에 미끄러진다. 코스개관: 서울역 4번 출구-남대문-잠두봉-봉수대-국립극장-반얀트리리조트-장충체육관-동대문-낙산-혜화문-혜화동 (9:55~15:30, 덥게 느껴진 가을날. 날이 뿌옇던 시계는 안 좋았던 날. 넷) 토요일 탁동과 선약이 있는지라 오늘 걷기로 한 날. 하늘은 근무중으로 결석. 10시 서울역에서 만났다. 에인절고는 오늘 못 온다고 해 기다리지도 않고 ..

둘레길도 만만하지 않네? (수락산 둘레길, 11/13)

문정희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어느 일몰의 시간이거나 창백한 달이 떠 있는 신새벽이어도 좋으리라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지극히 짧은 일격으로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 축전이 되고 싶다 가만히 바라보면 아이들의 놀이처럼 싱거운 화면, 그 위에 꽂히는 한 장의 햇살이고 싶다 사랑이라든가 심지어 깊은 슬픔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코스개관: 도봉산역 2번 출구 서울창포원-상도교-벽운동계곡 입구-노원골 입구-전망대-채석장 전망대-딩고개 갈림길-별빛마을-당고개역 (10:25~14:20, 맑고 시간이 갈 수록 날이 더워진 날. 넷) 우리집 컴의 문제인지 다음의 문제인지 글을 써도 저장이 안되 사진은 남았는데 산행기는 날아가 다시 쓴다. 창포원에서 둘레길 이벤트가 있어 스탬프 갯수대로 ..

기차바위를 염두에 두었으나 (수락산, 11/12)

이성선 실수는 삶을 쓸쓸하게 한다 실패는 생(生) 전부를 외롭게 한다 구름은 늘 실수하고 바람은 언제나 실패한다 나는 구름과 바람의 길을 걷는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구름은 항상 쓸쓸히 아름답고 바람은 온 밤을 갈대와 울며 지샌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길 구름과 바람의 길이 나의 길이다 코스개관: 장암역-노강서원-석림사-수락폭포 초입-기차바위 갈림길-우회로-헬기장-정상-깔딱고개-매월정-개울골 능선-벽운동 은빛아파트 (10:20~16:00, 바람은 좀 불었지만 햇살 따뜻하고 시계도 좋았던 날. 셋) 미모산악회 영업담당에 미모 담당인 명숙샘이 발 고장으로 당분간 산행이 힘들다고 한다. 셋이 산에 가기로 하고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수락산 가본지 오래라 수락산을 가기로 했다. 코스를 잡으려니 2월 기차바위 하강이..

낙엽이 무서웠던 뾰루봉~고동산 가기 (11/7)

가영심 나는 햇빛이 되고 싶었다. 햇빛의 신선한 고기떼가 되어 푸른 등지느러미를 푸득이면서 도시의 숲 사이를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고 싶었다. 수맥을 차단시킨 무수히 많은 콘크리트 빌딩들 그 목마름 속에서 비상구 안에 갇힌 내 삶을 탈출하고 싶었다. 따뜻한 눈물 세상 밖으로 떠나고 싶었다. 육교를 오르내리며 욕망의 높낮이를 숨가쁘게 재어보다가 시간의 빠른 물살처럼 빨려들어 가는 지하도 입구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가난과 비애를 들이마신다. 금빛 비늘 아무리 아름답게 번쩍거려도 어쩐지 막막한 날엔 뽀골 뽀골 아가미로 내뱉던 생의 물음표 돌아보지 마라. 삶의 그물에 건져 올려지는 건 도시의 더러운 악취와 어둠뿐 생의 고통이란 덧없음을 알아버릴 때 나는 세상을 끌어안는다. 적당히 해초처럼 흔들리면서 심해어처럼 ..

다락능선에서 사패산으로 (11/5)

복효근 저녁 풀잎에 맺히는 이슬 그 이슬에 앉는 별빛 하나 몇 광년 전 어느 별 어느 누가 켠 불빛이었을까 가슴이 마른 낙엽 같은 밤은 나도 촛불 하나 켜자 그러면 몇 광년 뒤 어느 별 가슴이 마른 낙엽 같은 어느 뉘 풀잎 이슬에 별빛 하나 맺힐까 코스개관: 도봉산역 1번 출구-입구-다락능선-은석암-포대전망대-사패산-원각사-원각사 입구 (10:05~16:20, 더워서 땀 많이 흘린 시계가 뿌옇던 날, 둘) 존폐 위기에 처한 나름 산악회. 하늘은 연속 결석 신고했고 리사도 지난번 모처럼 둘레길에 와 이번주 못온다고 하고 에인절고도 못 온단다. 목욜 남의편과 1박 예정이던 용화산을 당일에 가기로 하니 금욜 도봉산에 가면 붐비지 않고 산행을 할 수 있을것 같다. 작년 사패산 산행에 결석한 장공주도 오랫만에 사..

만추의 용화산 원점 회귀산행 (11/4)

김종상 소곤소곤 춥지 않겠나? 아기 자는 창틈을 몰래 엿보고. 살금살금 감기 들겠다, 잠든 강아지 집도 가만히 만져 보고. 자박자박 아이 발 시려 얼어붙은 땅 위를 돌돌 굴러서 속닥속닥 조리로 갈까? 담 밑에 가서 소복이 모여 앉는다. 코스개관: 용화산 휴양림-사여령-고탄령-안부-용화산정상-폭포-하얀집-휴양림 (10:00~15:30. 뭔가 내리는것 같던 날씨가 맑아지며 더워짐) 제주도 한라산에 가자던 공약이 약하게 춘천에 가서 산행도 하고 은계언니도 만나 1박을 하기로 계획. 헌데 금욜 오마니 보는 당번이 9시 까지 가야 한다고 당일로 다녀 오자고 한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삼악산을 갈까 하다 용화산으로 결정. 2007년 3월 춘천 친구 짱해피 덕분에 다녀왔는데 경치는 멋졌는데 험했고 고생한 기억이 있..

만추의 불암산 둘레길 가기 (10/30)

정일근 조심해! 자연에도 패밀리*가 있다. 이탈리아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와 같은 패밀리가 있다. 자연의 패밀리란 사람의 족보로 치자면 같은 항렬자를 쓰는 형제나 4촌쯤 되는, 그러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의 족보와는 다른, 자연의 인드라 망이 있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와 밀림의 왕인 사자는 고양이의 패밀리다. 고양이가 형이고 호랑이와 사자는 아우다. 은현리에 와서 도둑고양이에게 야단을 쳐보라. 달아나기는커녕 느릿느릿 왕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며 빤히 쳐다보기까지 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배경에는 도둑고양이에게 왕이 둘이나 있는 패밀리의 ‘빽’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흘레붙는 개에 대해 뜨거운 물을 뿌리며 방해해서는 안 된다. 늑대, 은빛여우, 너구리가 개의 패밀리다. 가끔씩 개가 하이 톤의 고독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