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여행기 3 (2/10) 편지 - 천상병(1930~93)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 산 이외.../2017일기 2017.02.22
부산 여행기 2 (2/9) 늦은 꽃 - 김종태(1971~ ) 남몰래 조금은 늦은 것들이 있다 늦게 온 것들은 고요하고 스산하다 철쭉도 다 간 시절에 자줏빛 등불 밝힌 자목련이 지키는 이슬 내린 화단에 앉아 내 생애 너무 일찍 사라진 인연과 때로 너무 늦게 찾아온 인연을 생각한다 꽃의 소식에 밖을 향한 눈을 감는다 사.. 산 이외.../2017일기 2017.02.22
철사모 부산 여행기1 (2/8~10) 산문시 1 - 신동엽(1930~69)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 산 이외.../2017일기 2017.02.20
칠순 패키지 산행 (천만산, 2/19) 지연(紙鳶) - 김소월(1902~34) 오후의 네 길거리 해가 들었다. 시정(市井)의 첫겨울의 적막함이여 우둑히 문어귀에 혼자 섰으면, 흰 눈의 잎사귀, 지연(紙鳶)이 뜬다. ‘해가 들었다’는 말로 미루어 마른눈이 막 갠 초겨울 저녁 시골 소읍쯤일까. 행인도 별로 없을 네 거리 쪽으로 우.. 산행기/2017산행일기 2017.02.20
날씨를 빙자로 1일 1산으로 끝내다 (보령 만수산. 2/5) 안개 - C 샌드버그(1878~1967) 안개는 온다 작은 고양이의 발 위로.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항구와 도시를 굽어보다가 다시 자리를 옮긴다. 『시카고 시편들(Chicago Poems)』에서 대도시 시카고의 부두노동자·트럭운전사 등 하위 주체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샌드버그는 사후 존슨 대통령으.. 산행기/2017산행일기 2017.02.05
100대 명산 화악산 가기 (1/15) 치명적인 -박상률(1958~) 상수리나무 휘감고 올라가는 칡넝쿨, 거침없다 휘감은 자리마다 나무의 살 깊게 패인다 나무의 굵은 허리 지나 가슴에 이르도록 세게 휘감은 사랑의 자국 상처 되어 깊이 박힌 치명적인 사랑에 붙들려 나무는 가만히 선 채 신음만 나직하다 (사랑하되 너무 깊이는 .. 산행기/2017산행일기 2017.01.15
신년산행 (금주산-관모봉,1/1) 마른장마3 - 이상호(1954 ∼ ) 말의 숲에서 길을 잃는다. 조약돌처럼 만지작거리다 손때 묻은 말들 그대에게 선뜻 건네지 못하고 이 말인지 저 말일지 주저하는 내 마음 저주하고 싶은 밤 사전 속 암전된 말들처럼 내 말은 달려가지 못한다 나의 말이 아니므로 말의 숲에서 말을 잊고 귀가 나.. 산행기/2017산행일기 2017.01.01
철사모 송년모임 (12/17) 두 개의 입술 - 조원(1968~ ) 바람이 나무에게 말하고 싶을 때 나무가 바람에게 말하고 싶을 때 서로의 입술을 포갠다 바람은 푸르고 멍든 잎사귀에 혀를 들이밀고 침 발라 새긴 말들을 핥아준다 때로는 울음도 문장이다 바람의 눈물을 받아 적느라 나무는 가지를 뻗어 하늘 맨 첫 장부터 마.. 산 이외.../2016일기장 2016.12.18
산정3총사 첫 눈밟기 산행 (북한산, 12/10) 폭설 -류근(1966~ )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 산행기/2016산행일기 2016.12.11
산정 쎈언니들 북한산 가기 (11/13) 붉은 난을 치다 - 배옥주(1962~) 칼바람이 난을 치네 바람의 모필이 능선을 일으키네 둥근 달집 속으로 날개를 태우며 불새들이 날아가네 묵향을 물고 가는 수천의 부리 마지막 한 획까지 서늘한 화염을 휘갈기네 붉은 발목 자르고 달아나는 억새 절명의 숨소리로 불의 낙관을 찍네 벼.. 산행기/2016산행일기 2016.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