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여행기 9 (삿포로 관광, 8/9) 화학선생님 -정양(1942~) 중간고사 화학시험은 문항 50개가 전부 ○X 문제였다 선생님은 답안지를 들고 와서 수업시간에 번호순으로 채점결과를 발표하셨다 기다리지도 않은 내 차례가 됐을 때 “아니 이 녀석은 전부 X를 쳤네,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 먼나라 이야기 2017.11.22
홋카이도 여행기 8 (리시리섬-삿포로, 8/8) 이마 -신미나(1978~)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젊은 시인인데 시의 목소리는 이 세상을 이미 한 바퀴 돌아온 사람처럼 제대로 익었다. 여기.. 먼나라 이야기 2017.11.21
홋카이도 여행기 7 (리시리산, 8/7) 분수 -이형기(1933~2005) 너는 언제나 한순간에 전부를 산다. 그리고 또 일시에 전부가 부서져 버린다. 부서짐이 곧 삶의 전부인 너의 모순의 물보라 그 속엔 하늘을 건너는 다리 무지개가 서 있다. 그러나 너는 꿈에 취하지 않는다. 열띠지도 않는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천개 만개의 눈빛을 .. 먼나라 이야기 2017.11.21
홋카이도 여행기 6 (레분섬~리시리섬, 8/6) 세상을 만드신 당신께 -박경리(1926~2008) 당신께서는 언제나 바늘구멍만큼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도 당신이 열어주실 틈새를 믿었습니다 달콤하게 어리광부리는 마음으로 어쩌면 나는 늘 행복했는지 행복했을 것입니다 목마르.. 먼나라 이야기 2017.11.21
수도기맥 숙제를 마치다 (지릿재-말정, 11/19) 젓갈 -이대흠(1968~ ) 어머니가 주신 반찬에는 어머니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입맛 없을 때 먹으라고 주신 젓갈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먹으려다 보니 이런, 어머니의 속을 절인 것 아닌가 젓갈은 어패류의 몸을 소금에 오래 삭힌 것. 이 시의 젓갈은 멸치젓이거나 갈치속젓일 것이다. 남도의 바.. 산행기/2017산행일기 2017.11.20
선물 (11/14) 서릿발 -송종찬(1966~) 담배공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담배를 끊으시려 은단을 자주 드셨다 붉은 마리화나를 피우던 나무들이 금단현상인 듯 잎을 떨구고 있다 빈 가지에 맺힌 은단 같은 서릿발 세상과 세상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점들이 무수히 깔려 있다 한때는 불꽃의 사금파리였을 오.. 산 이외.../2017일기 2017.11.14
대모-구룡산 가기 (11/12) <봄날> 박수진 무작정 봄을 기다리지 마라 봄이 오지 않는다고 징징대지 마라 바람부는 날이 봄날이다 웃는 날이 봄날이다 꽃이 피지 않아도 꽃은 지고 없어도 웃는 날이 봄날이다 아픈 날도 봄날이다 지나보면 안다 오늘이 그날이다 주말 육아에서 해방되어 같이 놀자는 명숙샘. 멀.. 산행기/2017산행일기 2017.11.12
홋카이도 여행기 5 (레분산 8시간 코스를 가다, 8/5) 산호 캐러 가다 -김광섭(1905~77) 갈매기 나래를 얻어 푸른 동해 바다를 날다. 바다가 안긴 하늘가 지평선 영원히 비장된 세계로 향하다가 바위에 부딪히는 흰 물결 속으로 나는 빠져서 빠져서 들어간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물결도 푸르고 마음도 푸른 날 하늘과 땅과 바다의 얘기.. 먼나라 이야기 2017.11.10
홋카이도 여행기 4 (왓카이나-레분섬, 8/4) 반성 743 -김영승(1959~)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 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 먼나라 이야기 2017.11.10
홋카이도 여행기 3 (아사히카와-왓카이나, 8/3) 채플린 Ⅱ -이세룡(1947~ ) 1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빈속에서 소리가 나는 건 뱃속의 녹슨 파이프를 쪼아대는 딱따구리 때문이다. 빈 지갑 속에서 채플린이 낡은 바이올린을 켜기 때문이다. 2 이 세계에 영원한 것은 두 개밖에 없다. 반찬 없이 먹는 밥의 슬픔과 밥과 고기반찬이 마주 볼 때 .. 먼나라 이야기 2017.11.10